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스팅스 전투 (문단 편집) === 전투 ===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600px-Bayeuxtapestryscene52.jpg|width=300]] || || ▲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일부분.[* 방패벽으로 돌진하는 노르만 기병대가 묘사되어있다.] || 10월 14일 아침, 노르만군의 궁수들이 잉글랜드의 방패 벽에 [[화살]]을 날리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. 언덕 위쪽에서 방패로 방어하고 있던 잉글랜드군에게는 화살 공격이 별 효과가 없었다. 게다가 잉글랜드군에는 궁수가 별로 없었기에 노르만 궁수는 더더욱 힘을 쓰지 못했다. 적이 쏜 화살을 주워다 쏠 수 없었기 때문이다(...).[* 초반의 전략 자체는 확실히 노르만군의 오판이었다는 평이 있다. 해럴드는 웨일스의 왕 그리피드(Gruffydd ap Llywelyn)를 박살내면서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는데, 이 웨일스 지역은 악명높은 잉글랜드 장궁병의 원조들이 드글대는 곳이었다. 궁병들과의 전투에 이골이 난 지휘관에게 그보다 못한 궁병을 들이댔으니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전략이었다(...).] 노르만군은 궁수의 공격 후에 창병을 전진시켰다. 그랬더니 화살은 물론이고 투창, 도끼, 돌 등 온갖 것들이 노르만 창병에게 쏟아졌다. 게다가 잉글랜드 보병들은 방패를 옆사람과 나란히 맞대고 버티며 말 그대로 방패의 벽을 이루고 있었다. 노르만 보병은 이러한 잉글랜드군의 방패벽을 뚫을 수 없었고, 대기하던 기병은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적을 향해 돌격했다. 하지만 기병 또한 돌파에 실패했고, 기가 꺾인 노르만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.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여 노르만군은 더 심한 혼란에 빠졌다. 신이 난 잉글랜드군은 도망치는 노르만군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이대로 노르만군이 털리려는 순간…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